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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조령산을 탐방하다.

와월당 2012. 5. 13. 00:39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어느새 지나고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봄이 사라졌다. 봄꽃은 피워야 할 시기를 놓쳐 갈팡질팡 이다. 매화꽃 축제를 준비했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던 봄꽃의 상징 매화는 4월이 되어서야 꽃을 피웠다. 뒤늦게 개화한 매화는 그나마 갑작스럽게 여름으로 변한 날씨 때문에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채 지고 말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옛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날씨다.

진달래와 철쭉은 약 한달 간의 간격을 두고 피는 것인데 올해는 비슷한 시기에 피었다. 벚꽃도 마찬가지다. 개화시기가 제멋대로다. 하루사이에 봄과 겨울을 겪어야하는 요즘 날씨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지난 4월 주왕산 산행에서는 반팔셔츠가 덥게 느껴졌는데 이번 조령산 산행에서는 오히려 춥게 느껴진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우뚝 솟은 조령산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간다는 새재(鳥嶺)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경새재는 바로 이 조령산의 마루를 넘는 재이다. 문경새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고갯길이다. 이왕이면 문경새재에서처럼 조령산(鳥嶺山)을 순우리말인 새재산이라고 했더라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아무튼 새재의 유래는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麻骨嶺)와 이유릿재(伊火峴, 梨花嶺)와의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사이), ()로 생긴 고개 등 여러 설이 있다.

 

이번 탐방은 이화령에서 시작됐다. 이화령은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갈미봉과의 안부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이 548m에 이른다. 백두대간의 이화령 구간은 일제 강점기 도로를 개설해 백두대간이 단절되었다. 한반도 자연생태계의 중심축 백두대간이 단절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괴산군에서 이 이화령 구간의 자연 생태축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이화령 고개에 도착하자 백두대간이화령이라는 커다란 표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황금연휴를 맞아 많은 탐방객들이 넓은 공터를 가득 메운 가운데 이화령 표석 앞에서는 탐방객들이 사진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본격적인 탐방길에 나선다.

 

 

 

이화령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방으로 뻗은 산줄기들에서 백두대간의 위용이 느껴진다. 탐방 길이 시작되는 산허리를 따라 난 좁은 산길이 많은 사람들로 인해 더 비좁아 보인다. 한꺼번에 몰려던 탐방객들이 길을 가득 메워 제대로 나아가지를 못하자 성급한 탐방객 서넛이 산비탈을 가로질러 새치기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급함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큰키나무들이 그늘을 만든 숲속에 작은 붓꽃이 짙은 보랏빛 꽃을 활짝 피웠다. 너덜겅과 너설지대가 반복되는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비탈길이 끝날 즈음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길목에 버티고 서 있다. 버드나무 아래에는 작은 샘이 있다. 많은 탐방객들이 샘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 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버드나무가 내미는 약수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시원한 물맛이 데워진 체온과 땀방울을 식혀준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산등성이 길이다. 큰 나무 아래 많은 야생화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예쁜 꽃망울을 터트렸다. 노란, 연분홍, 연보라, 하얀 꽃들이 탐방객들을 유혹한다. 꽃들이 만발한 바닥과는 달리 철쭉이나 단풍과 같은 나무들은 이제 막 잎눈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산등성이 길의 왼쪽과 오른쪽의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 오른쪽은 조림을 한 듯 잣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하늬바람이 부는 서쪽은 중간키의 나무들이 잡초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가지 끝에 맺혀 있는 잎눈이 높은 산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반팔셔츠가 산마루에 불어오는 바람을 감당하기엔 부족하여 팔뚝에 토시를 덧끼워 입었다. 바람의 강도가 점점 맹렬해지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날씨다. 초여름을 지나 다시 초봄으로 되돌아온 것 같다. 변화무쌍한 산중의 날씨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산을 오르게 되면 언제든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산에 오를 때는 여분의 옷을 준비하고, 먹거리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조령산 정상을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정상부의 고도(1,026m)가 높기는 하나 육산인데다가 탐방을 시작한 이화령의 고도가 높고 그리 길지 않은 산행길이기 때문이다. 소박함이 돋보이는 정상표석에는 백두대간 조령산이라는 간결한 글씨가 한자어로 음각되어 있다. 세운 이의 미사여구가 없는 두루뭉술한 표석이 인상적이다. 정상표석 앞에는 한꺼번에 몰려든 탐방객들로 붐벼 사진을 찍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정상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동으로는 주흘산이 넉넉한 품으로 오밀조밀한 산록들을 거느렸다. 부봉을 비롯한 무수한 암봉과 산줄기가 벽해의 거친 파도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파도가 그만 멈추고 만다. 비좁고 험한 탐방로가 막히고 만 것이다. 너무 많은 탐방객들이 몰린 탓이었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삼십여 분을 기다리고서야 겨우 병목현상을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너설과 암벽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내려다보기조차 힘든 아찔한 절벽위로 좁게 이어지는 너럭바위를 지날 때는 오금이 저린다. 칼등 같은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하고, 비좁은 틈새와 밧줄에 매달려 올라야 하는 암벽, 그 동안 수많은 산행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험준한 탐방로가 계속 이어진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를 탄 것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탐방로다.

 

 

위험한 길인만큼 스릴 또한 넘친다. 어려운 길을 지나고 나서 다가오는 통쾌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 나타나는 전망 또한 탐방객들의 눈과 가슴을 시원스럽게 뚫어준다.

어렵고 고된 산행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배고픔이다.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오를 넘겼지만 강행군은 멈춰지지 않았다. 신선암봉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후 한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산행은 계속되었다. 비좁은 길에 너무 많은 탐방객들이 몰리다보니 쉴 곳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행의 선두가 쉴 곳을 찾은 것은 오후 2시가 넘은 뒤였다.

뒤늦은 시간의 꿀맛 같은 점심을 끝내고 다시 산행이 계속되었다. 가파른 길이었지만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힘든 길을 지날 때마다 그에 맞는 보상이 이루어졌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5월의 신록,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산마루 길은 산 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기암 고석을 벗 삼아 산마루에 자란 고송들이 활짝 벌린 팔로 산 꾼들의 쉴 자리를 마련해 준다. 너럭바위 틈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는 활대처럼 휜 몸으로 모진 풍상 잘도 견디었다. 똬리를 튼 상처투성이의 소나무가 바위틈에 힘겹게 뿌리를 박은 모습이 애처롭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야생마 같은 길이 깃대봉 입구를 지나자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낙엽송과 잣나무가 숲을 이룬 숲 속에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방갈로와 삼림욕장, 임간휴게소도 갖춰져 있다. 조금 더 내려가자 드디어 조령관이 나타났다. 문경관문은 제1관문인 주흘관, 2관문인 조동문(조곡관), 3관문인 조령관 등 3중의 문으로 되어 있다. 문경관문은 영남지방과 한양을 잇는 관문으로 고려시대 때부터 군사적 요새이기도 했다.

일행 중에서 가장 늦게 조령관에 도착한 덕분에 제대로 관람을 하지 못한 채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오늘 일행 중에는 마침 회갑을 맞으신 분이 산행 후 축하연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탐방길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는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조령산 정상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던 병목현상은 도립공원으로서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관계당국의 지원으로 우회탐방로를 개설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1256일 조령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