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뫼

고 이영규 친구의 영전에 부쳐

와월당 2010. 2. 10. 13:42

입춘지절에 동장군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새봄을 시샘하였다. 지독한 추위에 더욱 간절했던 봄소식은 멀기만 했다. 하늘도 그런 동장군의 위세를 더는 두고 보지 않았다. 온 누리에 따뜻한 봄비를 뿌려 동장군의 차가운 가슴을 녹여냈다. 이른 봄비가 대지에 남아 있던 얼음 조각들을 남김없이 쓸어내렸다. 새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봄비가 내리던 날 우리는 50여년 고락을 함께 했던 친구와 육신의 별리를 해야 했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우리는 친구의 영혼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할 것이다. 이른 봄비가 대지를 적셔 만물을 소생시키듯 친구의 영혼도 하늘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육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영규는 부모님의 교육열에 힘입어 우리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대학교육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친구들의 절반정도는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일터로 나서야 했던 때였다. 물론 야학이나 방송을 통해 수학하여 학력을 높인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영규의 부모님은 뼈가 부서지도록 농삿일에 매달린 덕분에 육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영규의 부모님은 농한기인 겨울에는 강변 자갈밭에 황토를 날라 논밭을 만들고 봄에는 씨를 뿌렸다. 그러나 여름만 되면 애써 만든 논밭이 강물의 범람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강변에 제대로 된 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규의 부모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논밭을 만들고 둑도 쌓았다. 그렇게 영규의 부모님은 강변에 모래 자갈밭을 옥토로 바꾸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분들이다. 그런 부모님의 교육열도 있었지만 변변하게 공부할 만한 참고서 조차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공부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엿 볼 수 있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일벌레였던 영규의 부친도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자식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일자리도 얻었다.

 영규가 병을 얻은 것은 삼년 전의 일이다. 직업의 특성상 과음을 자주할 수 밖에 없었던 친구는 갑작스런 간암 선고를 받고 서울 유명 병원에서 간 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되는 듯 했다. 회사에 복직도 포기한 채 시골에서 요양을 하며 삼년여를 지내던 친구는 지극한 가족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입춘이 막 지난 2010년 2월 6일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 영규는 우리 고향 친구들의 모임인 동심회에서도 총무를 맡아 친구들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하였다. 어느 해 여름 함양 백양산 계곡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음식 준비는 물론 야영도구들을 꼼꼼히 챙겨 즐거운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그 뒤에도 거제도 몽돌해수욕장, 제주도 여행에서도 우리 친구들을 위해 행사를 준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제주도 여행에서는 항공권 예매는 물론 일정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동반가족들까지도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큰 자동차 회사의 영업소장을 맡아 모든 일에 적극적이면서도 꼼꼼한 일처리로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 받았던 것 같다. 그런 경험들이 우리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내가 부음을 받은 것은 지난 토요일 밤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요란스럽게 벨이 울렸다. 휴대전화였다. 이런 밤중에 오는 전화라면 긴급한 일임에 틀림없다.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규가 영면했다는 소식이었다. 고향 친구의 부음을 듣는 것은 처음이라 소식을 전화는 친구의 음성도 가늘게 떨렸다. 그날 밤 모든 친구들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부음을 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친구의 장례식에 동심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마음 속으로 새기며 사무실로 나갔다. 동심회 통장과 도장을 챙겨 들고 나왔다. 카드로 우선 필요한 돈을 찾아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진주행 버스는 11시 30분 출발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지 세 시간 반만에 진주에 도착했다. 경상대 병원 장례식장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시내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새삼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경상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종수가 반갑게 맞아준다.

 근조화환이 늘어선 2층 영안실은 벌써 문상객들로 가득했다. 먼저 친구의 영전에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주름조차 없는 동안(童顔)인 영정 속의 친구가 내게 엷은 미소를 보내는 것만 같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저 동안 속의 친구가 주검이 되어 싸늘한 관속에 누워있다니... 삼여년 투병생활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멀다는 핑계로 문병 한번 못간 것이 너무나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용서해라 친구여! 참으로 미안하구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마산, 부산, 울산 등에서 하나 둘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친구의 영정앞에 고개를 숙인다. 빈소에는 어린 아들과 동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겨우 쉰을 넘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아직도 할일이 너무나 많건만 저 어린 삼남매를 두고, 친구여! 어찌 떠난단 말인가?

 그날 밤 자정 무렵부터 때 아닌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막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대지의 생명들에게 내리는 선물인가? 뜬눈으로 함께 밤을 샌 친구들과 함께 장지인 고향마을로 올라갔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가늘어졌다가 굵어지기를 반복한다. 친구의 안식처는 방목마을 뒷산으로 정해졌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상두꾼들이 모여 묘지를 준비하고 운구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상조회에서는 야외용 천막을 치고 빈소를 마련해 문상객들을 맞고 있었다.

 묘혈에서는 돌맹이 하나 없는 고운 황토가 친구의 주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주교 의식대로 진행된 장례절차에 따라 상여가 없는 관은 나를 비롯한 친구들과 상두꾼들에 의해 묘지까지 운구되었다. 친구의 주검이 든 관은 간단한 미사가 끝나고 백관들의 손에 이끌리어 묘혈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친구여!

 우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친구여!

 부디 하늘에서 만나는 그날까지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