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옥녀봉의 전설을 품은 사량도

와월당 2012. 5. 21. 15:27

옥녀봉의 전설을 품은 사량도

코끝에 스미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본격적인 여름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동안 뒤죽박죽이던 날씨도 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계절의 시계에 맞춰 짙어가는 녹음이 도심의 황량함을 조금이나마 들어주는 것 같다.

나는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늘 푸른 산과 들을 마주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 후 부모님 곁을 떠나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지 어느새 30여 년, 언제부턴가 나는 도심을 벗어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지난 십여 년을 끊임없이 산과들을 찾아다녔던 것도 전원을 향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한려해상 국립공원 속 남쪽바다 작은 섬 사량도에서 잠시나마 전원의 꿈을 꾸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지난주에 내게 참으로 슬픈 일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키우려고 했던 강아지 모란이를 입양한지 불과 8일 만에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성을 다하느라고 했지만 나의 무지로 인해 작은 생명 하나를 죽이고 말았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모란이는 내게 처음으로 동물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은 강아지였다. 나는 동물을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남들이 지나치게 동물에 대한 사랑을 쏟는 것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 슬픔을 잊고자 강아지가 죽은 다음날 강원도 오음산으로 새벽 같이 산행을 떠났다. 하루 종일 아내와 산나물을 채취하며 산속을 헤매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산은 이처럼 내게 위로와 믿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을 찾는다.

사량도로 가기 위해 새벽 610분경에 집을 나서 백제고분군 주차장 앞에 이르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쯤에 예약을 받아 전 좌석을 채운 버스가 서울을 벗어난 것은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사량도에 들어가기 위해 경남 고성 상족암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11시행 배를 타야 한다. 죽암휴게소와 산청휴게소를 경유하여 고성에 있는 상족암 선착장에는 예약시간보다 10분가량 늦게 도착하였다.

 

 

미리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다른 승객들이 있어 미안한 마음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줄달음을 쳐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늦어진 출항시간 때문에 계속 빨리 탑승하라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거대한 팽나무고목 그늘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자 모양의 길이 이어져 있다. 유람선과 연결된 다리를 건너 드디어 사량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유람선 안에는 먼저 온 승객들이 반쯤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뱃머리에서 푸른 비릿한 바다냄새를 품은 바람이 코끝으로 빨려 든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리는 유람선에 몸을 맡긴지 20여분 만에 사량도 내지 선착장에 닿았다. 채 바다를 느끼기도 전에 유람선을 내려야만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사량도에 첫발을 내 디뎠다. 아름드리 팽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이룬 내지마을에 들어서자 바다의 땅! 통영, 환상의 섬 사량이라는 돌비가 눈에 들어온다.

시작은 육산이었다. 산행들머리인 내지항 산자락에는 해풍에 강한 아름드리 흑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푸른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손짓에 바다는 잔잔한 파도로 화답한다. 파도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희미한 얼룩이 져 있다. 파란 도화지에는 하얀 물감을 기다랗게 뿌려 놓았다.

 

 

 

가파르다. 더운 김이 올라오는 흙길이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낸 큰키나무들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조금 더 오르니 너설길이다. 올라가는 내내 숨바꼭질을 하는 너럭바위와 벼랑이 칼집을 낸 고깃덩이 같기도 하고 얇게 저민 무 같기도 하다. 암봉과 산등성이를 형성하고 있는 지층의 절리가 우리가 유람선을 탔던 상족암의 지층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량도의 절리는 상족암의 지층보다 좀 더 얇게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층상절리가 발달한 이 곳이 고립무원의 섬에서 해풍에 깎이고, 파도에 다듬어져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자연이란 이처럼 위대하고, 감히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흡사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산등성이에 다다르자 사방으로 푸른 바다 위에 떠오른 하얀 부표, 부표와 섬 사이를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배, 하얀 테를 두르고 봉긋이 솟은 크고 작은 섬들이 푸른 도화지에 갖가지 그림을 그려 놓은 듯 아련하다.

 

거칠던 너설을 지날 때 흐르던 땀은 시원한 바닷바람이 식혀준다. 산등성이의 오르내리는 길에 나무그늘이 있어 산행을 즐기기엔 아주 좋은 곳이다. 또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아기자기한 항구가 산꾼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손바닥 같은 작은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서어나무와 느릅나무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나무가 숲을 이룬 곳을 지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우리가 가는 지리산(지리망산)과 돈지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길이다. 여기서 지리산 정상까지는 60미터로 정상 코앞에 이른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윗섬과 아랫섬으로 나눠져 있는 사량도의 아랫섬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오석으로 된 표지석이 너럭바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해발 397.8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다위에 바로 떠 있는 섬이어서 무시할 수 없는 높이다. 오후 1시경 도착한 터라 점심을 먹기 위해 동행한 산꾼들이 미리 잡아놓은 나무그늘 아래로 합류하였다. 자리를 잡자마자 방광철 등반대장님이 권하는 맥주가 산행의 피로와 함께 시원하게 목줄을 타고 내려간다. 각자 싸온 소박한 점심이지만 여럿이 내놓으니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맛있게 먹은 점심을 마치고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가마봉과 옥녀봉을 거쳐 대항에서 오후 다섯 시에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 사방이 툭 트인 산등성에서 우리가 가야할 가마봉과 옥녀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의 끝에 뾰족하게 솟은 고동산도 보인다. 공룡의 등에 난 뿔처럼, 때로는 공룡의 비늘처럼 산등성이 길에 갖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바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위에서 떨어진 비늘 조각들은 가끔 산꾼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기도 한다.

불모산(달바위)을 우회하다보면 절리가 잘 발달된 암벽과 칼 잘라 놓은 듯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암벽을 볼 수 있다. 이끼 낀 암벽 아래로는 커다란 참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암벽과 나무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진다.

달바위 갈림길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힘든 고갯길을 넘어 가마봉을 타고 넘어, 옥녀봉 벼랑 앞에 섰다. 옥녀는 저 가파른 벼랑 위를 처녀의 몸으로 어떻게 오를 수 있었을까? 밧줄에 의지하고서도 힘들게 올라야하는 저 암벽을 말이다.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야 결코 오르지 못했으리라. 잠깐의 욕망을 참지 못해 딸을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의 뒤늦은 절규가 저 가파른 벼랑 끝에서 메아리가 되어 내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다.

 

옥녀의 간절한 소원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옥녀봉을 뒤로하고 하산 길을 서둘렀다. 대항에 도착하여 먼저 온 사람들과 합류한 것은 유람선이 도착할 시간을 20여분 앞둔 시간이었다.

<2012520일 사량도에서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