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의 전설, 주왕산
주왕의 전설, 주왕산
길고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 이젠 정말로 봄이 오려나보다. 엊그제까지 입었던 겨울 옷 훌훌 벗어던지고 반팔 등산셔츠를 꺼내 입는다. 아내는 혹 춥지나 않을까 굳이 긴 셔츠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늘 원정 산행을 갈 때면 들뜬 기분에 잠을 설치곤 했는데 간밤에는 아주 잘 잤다. 아내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세상모르고 잘 뻔하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경북 청송의 주왕산으로 원정 산행을 가는 날이다.
당나라 때 진나라의 후손 주도가 주나라의 재건을 위해 스스로 후주천왕이라 칭하고 반역을 꾀했다가 실패하여 신라 땅으로 숨어든 곳이 지금의 주왕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도는 주왕산에서 은거하던 중 당나라의 사주를 받은 신라장수 마장군에게 패하여 주왕굴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20여 년 전에도 주왕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암벽과 계곡이 참 좋았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오늘 드디어 주왕산 산행 길에 나서게 되었다.
<치악 휴게소>
지난 3월 원정 산행 때와 같은 시간인 6시 40분경에 집을 나섰는데 벌써 온 천지가 훤하다.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 지난 지도 20여일이 지났으니 해가 길어질 만도 하다. 산행 출발지인 백제고분군 주차장 입구에 이르니 낯이 익은 사람들도 있다. 지난 3월 첫째 주에 마이산 산행에 참여한 이후로 세 번째 산행이다. 버스에 오르니 처남부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남부부는 오늘 송파한우리 산악회에서의 첫 산행이다.
밤엔 자려고해도 오지 않던 잠도 왜 차에만 오르면 졸리는지 모르겠다. 참 묘한 일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를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치악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던 버스가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워낙 원거리이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주왕산 국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기암괴석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산이다. 역시 국립공원다운 아름다운 산세다.
늘어진 벚나무가지에 매달린 꽃봉오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봉긋하게 맺혀있다. 오늘 낮 기온이 섭씨 20도를 넘는다고 하니 봄을 맞이할 겨를도 없이 초여름 날씨가 되려나 보다. 아무튼 오늘 반팔셔츠를 입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산행 들머리를 들어서니 넓은 계곡 언저리에 수양버들 파릇한 실가지가 물결 속에 일렁인다.
산더덕, 산마, 약도라지... 온갖 약초들이 즐비한 상점가를 지나 팽나무 가지 많은 물가에는 푸릇한 봄내음이 가득하다. 산길로 들어서기 직전 산자락에 넓은 터에 대전사(大典寺)가 눈에 띈다. 대전사라는 절 이름은 주왕의 아들이름인 대전도군(大典道君)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모아 훈련을 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때 왜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冥府殿)만이 남아 있다.
대전사 너머로 기암(旗岩)이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기암은 마장군이 이곳에 은거하던 주왕을 제압하고 대장기(大將旗)를 꽂았다 하여 기암이라고 불리고 있다. 대전사를 뒤로하고 넓은 숲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장군봉과 제1, 2, 3폭포로 곧장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우리는 오른쪽 산등성이 길을 따라 주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보니 얼마가지 않아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에 다들 지친 모습이다. 걸음이 느려지고 쉬는 횟수도 많아진다.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가 남아 있는 숲속에 군데군데 피어 있는 진달래는 진분홍 향기를 뿜어낸다. 황량한 숲길에 낙엽이불 걷어내고 삐죽이 고개를 내민 보랏빛 꽃 한 송이 예쁘기도 하다. 큰 나무 그늘지기 전에 파릇한 이파리 피워낸 작은 관목들의 지혜도 놀랍다. 산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숨은 턱에 차오른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낸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바위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주왕계곡은 기암괴석으로 협곡을 이루고 있으며, 군데군데 폭포를 만들면서 흐르는 계곡물이 절경을 만들어 낸다. 또한 주왕산에는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봄에는 신록,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 중간쯤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바위산 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혈암, 장군봉, 기암,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우람한 봉우리마다 푸른 옷을 걸쳐 입었다. 헤지고 찢어진 대로 걸쳐 입은 옷이지만 그 푸름만으로 아름답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산등성이길이다. 수십 년을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소나무가 산등성이와 산허리를 따라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모진 풍상 비바람을 잘도 견디었건만 인간의 손길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일제 놈들 우리 산야 착취할 때 배운 못된 버릇인가. 소나무에 상처내고 송진을 뽑아 무엇을 했던 걸까? 인간들의 욕심으로 빚어진 빗살무늬 칼자국에 굳은 살 배긴 소나무, 상처가 너무나 깊어 눈물조차 말라버렸다. 소나무의 상처가 바로 우리 인간들의 깊고 깊은 상처인 것을…
산등성이 길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정상으로 이어진다. 교목들에 둘러싸인 주왕산 정상에는 해발 722미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바위산이라고 알려져 있는 산이지만 정작 정상에는 바위가 없는 육산이다.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한 정상인데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꽤나 허기가 돌았다.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았지만 정상 부근에는 마땅한 곳이 없다. 조금 더 내려가자 길가로 약간 넓은 곳이 있었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놓았다. 산악회 회장단에서 정상에서 마실 술로 준비한 송주를 곁들여 맛있는 식사를 하고 본격적인 하산 길에 들어갔다.
산등성이 길을 따라 내려가던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후리메기 삼거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 더 내려가자 산비탈에 금강소나무가 쭉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듯 하늘을 찌를 듯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일명 춘양목이라고 불리는 금강소나무는 우리나라의 백두대간을 따라 경북과 강원지역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예부터 궁궐을 지을 때 쓰이는 소나무로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다.
산비탈 길을 내려와 계곡부에 이르자 우락부락 근육질을 자랑하는 서어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작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속에 낙엽이 쌓여 물고기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계곡이 군데군데 소(沼)를 이루며 유유히 흘러간다. 맑은 물속 너럭바위에 다슬기 한마리가 작은 더듬이를 내밀고 느릿느릿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제3폭포 갈림길에 닿았다. 제3폭포는 주왕산 협곡 중에서 가장 위쪽 위치해 있으며 2단으로 된 폭포로 제2폭포에 비해 그 규모가 크다. 폭포 아래 소(沼)가 매우 깊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뒤쳐진 발걸음이라 서둘러 제2폭포로 향했다. 제2폭포는 제3폭포와는 물길이 다르며 협곡을 지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제3폭포와 같이 2단으로 이뤄진 폭포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제3폭포>
<제2폭포에서>
폭포를 지나 잘 다듬어진 넓은 길가로 칙칙한 나뭇가지에 노란 꽃망울을 단 생강나무가 봄을 선포한다. 아찔한 돌벼랑에 핀 진달래, 뽀얀 솜털을 덮고 물가에 핀 버들강아지엔 어릴 적 추억을 담아본다. 망개나무, 자작나무, 소태나무가 자생하는 계곡을 따라 폭포 탐방을 끝내고 드디어 주왕산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협곡에 다다랐다. 협곡에 이르러서야 20여 년 전 기억이 되살아난다.
주왕산 협곡! 바로 이곳이었구나.
20여 년 전 기억 속의 광경, 그 웅장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억겁의 세월을 깎이고 다듬어진 암벽과 폭포들, 지금도 멈추지 않는, 우리 인간이 가늠할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섬세하고도 위대한 자연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니. 아! 자연의 위대함이여!
<주왕산 협곡, 제1폭포>
폭포에서 부서진 물은 다시 소(沼)를 이루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물줄기는 다시 협곡을 따라 쉼 없이 흐른다. 돌벼랑도 좁은 바위틈도 넓은 너럭바위도 결코 막힘이 없다. 막힘없는 계곡의 물길처럼 우리도 멈출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다리를 건넌다.
<시루봉>
<학소대>
협곡을 지나 학소교를 건너면 학소대가 있다. 그 맞은편으로는 시루봉이 있다. 학소대(鶴巢臺)는 옛날 백학과 청학 한 쌍이 절벽에 둥지(巢)를 짓고 살았는데, 백학은 어느 날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 잃은 청학이 날마다 슬피 울며 절벽 주위를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학이 사라진 절벽엔 둥그런 말벌집이 학의 둥지를 대신하고 있다. 시루봉은 흡사 떡시루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남근석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또 많은 검정을 통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으나 제1폭포는 아무래도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주왕산협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폭포라는 좁은 개념보다는 계곡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다.
<주상절리>
<주왕굴>
약 7천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흘러내리면서 형성된 주왕산은 풍화작용으로 바위표면에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화산재의 일종인 회류응회암은 침식 작용에 약하여 협곡과 절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루봉과 학소대를 뒤로 하고 주왕이 숨어 살았다는 주왕굴을 향해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주왕굴은 협곡 사이 암벽에 위치한 자연동굴이다.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을 피하여 주왕굴에 은거하던 중, 어느 날 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 일행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주왕암을 지나 협곡에 철제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주왕굴이 있다. 굴 입구에서는 전해져 오는 것처럼 굴 상단에서 빗물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잠시 참배를 하고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작은 물병으로 물을 받으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다. 옷을 흠뻑 적시면서 받은 한 모금의 물이 참으로 시원하다. 주왕의 전설도 여기서 끝을 맺는다.
<2012년 4월15일>